다섯 번째 놀이
James Blake - The Wilhelm Scream
알려고 할수록 미끄러지는 것, 간절할수록 멀어지는 것. 다가갈수록 흐릿해지는 것들이 성글성글 떠올랐다. 소유하고 싶은 마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적당히 덜어내 균형을 잡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어떤 생각도 노력도 하기 싫어지는 날들이 며칠이고 이어지기도 한다. 방어적이지 않으려는 노력, 욕심을 내려놓으려는 노력은 강박이 되어 나를 덮친다. 온통, 뿌옇다.
흐리멍덩한 생각 속에 가만히 있다. 어쨌든 시간은 지나가니까
흔들림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해도, 어떤 믿음이나 최소한의 확신은 필요했다...... .
생각이나 말에 마침표를 찍는 행위가 두려웠던 적이 있다. 언제고 변할 수 있는 내 생각이 마치 마침표로 인해 박제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말이건 ‘인 것 같다’, ‘듯하다’로 매듭짓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가 슬쩍 흘리듯 말을 꺼냈다.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마침표를 찍는 거라고. 마침표를 찍었으면 그 생각에 책임을 지면 되는 거고, 나중에 그게 틀렸다고 판단되면 틀린 걸 인정하면 그만이라고.
그러게. 나는 뭘 그리 망설였을까. 다시 생각해보면 변할 수 있니 없니 하는 것도 그저 핑계일지 모른다. 세상을 딱 떨어지게 보는 사람들에 대한 반골 기질에서 시작해 책임을 지는 것도, 오해를 받는 것도, 틀린 것을 수용해야 하는 것도 가능하면 피하고자 했던 내 게으름이 길들인 습관일 뿐... . 흔들리는 것이 힘들어 흔들릴 수 있는 세계 자체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피해 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언제까지 서성이기만 할 수는 없었고, 어찌 됐든 최소한의 확신은 가지자고 생각했다. 그 최소한의 확신은 또 흔들리고 흔들리겠지만, 뭐 어때.
그림은 자신의 확신이 흔들림에 내몰렸을 때의 아슬아슬한 심정을 묘사한다. 풍성하게 우거진 식물들 사이로 가녀린 다리가 드러난다. 자신의 몸을 겨우 지탱하듯, 불안해 보인다. 그 불안함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대비되며 둘 사이에 묘한 긴장을 유발한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림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다. 그림은 언뜻 보면 인간의 유약함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인간 내면의 단단함을 말하고 있다. 가느다란 다리에 들어간 옅은 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단단한 내적 힘을 나타낸다. 꽃과 식물,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단단함에 양분을 주는 원초적인 연결성을 상징하며, 흔들림 뒤에 기다리는 성장의 기쁨과 여유를 표현한다.
라깡에 의하면 주체의 역사 속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반복된다. 우리의 욕망구조는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라깡에게 시간개념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에게 인생은 동어반복, 똑같은 욕망의 반복으로 변주될 뿐이다.
어쩌면 ‘네 번째 놀이’의 아이에서 몸만 자란 어른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릴수록, 그림을 해석할수록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담자의 서사가 지겨워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반복하게 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한 테크닉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림을 통해 갖가지 형상으로 변주하며 같은 이야기를 부단히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반복하면 그 덧없는 반복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 조금은 유연하게 또 다른 반복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어찌 됐든 그림이 어떤 반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언캐니를 일으키는 무의식적인 것이 그림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 반복이 증명해 주는 것일 테니까.
배경 음악: 최상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