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놀이
Rhye - Please
부단히 애를 쓸 때가 있다. 미끄러지는 것을 애써 움켜쥐고도 모를 때가 많다. 미간에 흐르는 불편한 긴장은 나의 온 감각을 마비시킨다.
페르소나가 다양할수록 사회, 집단과의 소통은 유연해진다. 상황에 따라 꺼내 쓰며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융통성 있게 수행한다.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우리에게, 페르소나는 생존을 위한 도구에 다름 아니다. 다만, 특정 페르소나가 필요 이상으로 두꺼워진다면, 혹은 내가 원하는 가치와 나에게 요구되는 페르소나 사이의 괴리로 균형이 흔들린다면, 잠시 쉬어가야 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이마에 내 천자를 새기며 비뚤어져 버린, 미운 어른이가 될 테니까.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 애씀과 긴장이 툭, 무심코 풀려버린다. 휘몰아치던 감정이 지나간 후 찾아드는 덤덤함. 그때 말해지는 것들의 담백함은 손에 닿으면 녹을 듯한 섬세함으로 마음에 녹아든다. 움켜쥔 페르소나가 힘을 잃고 벗겨지면, 진심에 가까운 것들이 말해진다. 힘 빠진 목소리의 단단한 읊조림은 듣는 이의 애씀을 묘하게 보듬는다.
웅덩이의 기름띠
비 갠 후 길가 웅덩이에 고인 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알록달록 묘한 빛깔의 기름띠가 물 위를 맴돈다. 봐도 봐도 예쁜데, 그것을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혹여 기름이 몸에 묻을까, 가까이 가지 말라 당부할 뿐이었다. 무지개는 예쁘다 하면서 왜 기름띠는 피하는 걸까. 둘 다 비 갠 후에야 볼 수 있고, 둘 다 알록달록 예쁜데... .
도통 어른들의 마음은 모를 일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기름띠를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다만 어렸을 때의 그 감정을 떠올리면 아련하고 애틋한 마음이 올라온다.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묘한 빛깔의 기름띠 위로 내 모습이 겹쳐졌다. 학생도 작가도 아닌, 직장인도 백수도 아닌. 어른도 아이도 아닌,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못 그리는 것도 아닌. 애매한 곳에 애매하게 겉도는 나 자신처럼 느껴졌다. 둥지를 떠나지 못하고 그저 주위를 맴도는. 애매한 새처럼.
초록과 빨강의 강한 보색 대비로 그림 전반에 긴장이 흐른다. 그림의 꽃과 새는 아이의 내면을 보여준다. 배경에 섞여 흘러내리듯 표현된 꽃들은 섞이지 못하고 기름띠처럼 겉도는 아이의 내적 갈등과 유약함을 표현한다. 하단에 있는 보송보송 여린 꽃들은 아이의 순수함을 표현하며, 그 따듯한 질감으로 그림에 흐르는 긴장을 보듬는다. 새와 그 질감도 그렇다. 긴장된 아이를 안심시키고 달래는 두두doudou가 되어준다.
땅과 하늘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새는 현실과 현실 너머 세상을 이어주는 메신저로 상징되어 왔다. 그림의 아이는 표정을 숨긴 채 불안한 듯 새를 꼭 붙들고 있다. 아이의 내면이 투사된 새의 눈빛을 통해 꽃 뒤로 가려진 아이의 불안이 그림 전체에 맴돈다.
그림에 표현된 새는 아이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메신저로 해석될 수 있다. 새가 나타나면 아이는 상징계의 분열된 주체로서 강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아이는 새를 놓을 수 없다. 새를 놓치는 순간 무의식의 문이 닫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의 내면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새는 매신저이자 곧 아이 자신이다. 아이는 긴장이 감도는 멜랑꼴리한 세계에서 새를, 자신을 달래며 불안에 머물고 있다.
배경 음악: 최상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