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놀이
Air - Alone In Kyoto
커다란 비눗방울에 들어오면 이런 느낌일까. 커졌다 작아졌다 자유롭게 일그러지며 공중을 떠다닌다.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 눈앞을 아른거린다. 마치 최면에 걸려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온 느낌. 통통 뛰어다니는 작은 새를 쫓아 과거의 어느 지점에 들어선 기분이다. 내 기억인지 외부에서 들어온 이미지가 내 것 마냥 기억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음악을 따라 떠오르는 꿈결 같은 이미지는 어릴 적 기억에 깃든 아련한 감정들을 소환한다. 멜랑꼴리한 기분에 마음이 아려오다 파도 소리와 함께 풀어진다.
무의식
닫힌 방. 우리 내면 깊숙한 어느 곳에는 쉬이 드러나지 않는 방이 있다. 그곳에는 의식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욕망, 상처, 아픔 등이 억압된 채 원초적인 모습으로 살아있다.
그림에 보이는 방은 무의식을 표현한다. 적막이 감도는 방 안에 살아 숨 쉬는 식물과 꽃은 원초적인 욕망을 상징하며, 묘한 일렁임으로 공간에 긴장감을 형성한다.
벽 위로 무언가의 흔적들이 보인다. 오랜 시간 깊게 바랜 흔적도, 금방이라도 살아날 듯 아슬아슬한 흔적도 한 공간에 어우러지며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꽃 잎사귀가 늘어뜨려진다. 창밖으로 일그러진 숲의 풍경이 보인다. 섞일 수 없는 두 세계 사이로 기름띠 같은 아우라가 흘러내린다.
초기의 라깡에게 개인적 시간은 상상계적인 것이었다. 특정 이미지에 고착되어 상징계에 들어오지 못하고 주체를 폐쇄된 시간성에 가두는 것으로 간주하며, 내담자의 증상을 없애고 주체를 상징계로 안전하게 진입시키는 것이 정신분석가의 역할이라고 여기는 다소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후기의 라깡은 보편적 시간으로부터 개인적 시간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분석가의 역할이며, 대타자의 시간으로부터 다른 속도의 시간, 고독의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내담자의 ‘증상’은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신뢰해야 할 대상이 된다. 대타자의 시간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증상’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신뢰해야 한다. 증상을 타자의 언어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을 보존하고 그것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영상에는 ‘네 번째 놀이’에서 아이의 품에 안겨있던 빨간 새가 등장한다.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해 주는 전달자로 표현되는 새는, 무의식이 의식에게 말을 거는 ‘증상’을 상징함에 다름아니다.
배경 음악: 최상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