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cil and colored pencil on paper, 298×420(mm), 2019

pencil and colored pencil on paper, 298×420(mm), 2019

두 번째 놀이

Jónsi & Alex - Stokkseyri

오롯이 혼자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된 기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와 연결된 느낌이다. 충만과 설렘 위로 오묘한 아우라가 감돈다. 물웅덩이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일렁이는 수면 위로 얼굴이 흩어진다. 불현듯 형용할 수 없는 대자연의 벅참이 숨 막힐 듯 죄어오다 명치 끝을 아리며 아주 치밀하고 정교하게 세포 하나하나를 각성시키며 유유히 빠져나간다.


연결

“미타쿠예 오야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메리칸 인디언의 인사말이다. 우리는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세상 만물은 서로 관계하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누군가의 딸이고, 동생이고, 친구이고,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미워하는 사람이고, 동네 주민이고, 오늘 스친 178번째 행인이다. 나를 ‘나’로 만들어 주는 것은 나와 관계하는 모든 것들이며 ‘나’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그 관계 안에서 가능해질 뿐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나는 ‘나’로 정의될 수 없다. 

거울단계를 거치며 자아가 형성되는 우리는 세계 내에 자신의 좌표를 정립함으로써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고, 자기 존재에 대한 일관성을 가지게 된다.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며 안정성을 확보하려 한다. 다만, ‘나’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히며 발생한 최초의 결여로 인해 우리는 부단히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며, 스스로 정의한 이상적인 틀에 자신을 애써 밀어 넣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진짜 내 모습과 멀어지려 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거울단계 이전 우리의 세포에 새겨진 감각, 어머니라는 대자연과의 합일에서 경험된 그 감각은 모든 것을 만물에 연결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림의 좌측 상단에 위치한 보랏빛 꽃은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하며, 현실과 미지의 세계를 이어주는 연결 통로가 된다. <이상한 나라의 폴>의 찌찌가 뿅망치를 두드리면 열리는 그 신비한 통로처럼. 

하늘하늘 일렁이는 꽃과 풀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그림의 시간적 배경은 세상이 황혼으로 물드는 해 질 무렵의 저녁이다. 노을은 언제 봐도 내 마음을 이상하게 만든다. 내게 그것은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이다. 해 질 녘 노을을 보고 있으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하다. 익숙했던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마법의 순간이다. 일상에 감춰졌던 존재의 아름다움이 드러날 수 있게, 하루에 단 몇 분의 시간이 허락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빛의 산란에 의한 단순한 현상일 뿐이겠지만, 나는 그 시간에 잠기는 몽상이 참 좋다. 


퀴스타브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에서 자극을 받은 뒤샹은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러운 작업을 진행한다. 바로 그가 남긴 최후의 작품 <에탕도네Étant donnés_주어진 것>이다. 에탕도네는 지금까지 보는 주체였던 관람자를 보여짐을 당하는 주체로 전환시켰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최초의 시각 경험은 바라보아짐을 당하는 경험으로, 이것이 시관충동으로 남아있는 우리는 에탕도네를 관람할 때‘응시’에 노출되고,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두려움,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묵직한 나무문에 두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폭포를 배경으로 풀숲에 누워있는 여인의 나체가 눈에 들어온다. 손에 가스등을 들고 있는 여인은 관람자를 향해 두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다. 뒤샹은 관람자가 이미지를 엿보는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관람자의 관음증을 자극한다. 이미지를 엿본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 관람자는 응시에 노출된다. 

“타자를 느끼는 것은 타자를 엿보는 것을 들키는 순간이다.”

나는 ‘응시’를 출현시킬 수 있는 요소를 본 작품에 적용해 보다 직접적으로 언캐니를 경험할 수 있는 그림을 연출하고자 했다. 다만 응시에 노출되었을 때, 대개의 경우 이를 견디지 못하고 눈앞의 상황을 회피한 채 관람이 마무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징계의 신경증적 주체인 우리에게 응시는 폭력적이고,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편한 자극을 유의미한 예술 활동으로 연결하는데 필요한 힘을 일상적 시간 안에서 무리하게 요구하기보다, 무의식적 욕망을 위해 의식이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적당한 자극을 반복적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그림에 녹여내고 싶었다. 성적으로 읽힐 수 있는 요소들을 이미지에 담아내고,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게 이미지를 중의적으로 표현했다. 관객이 자신을 응시에 노출시킬 수도, 숨길 수도 있는 은밀한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배경 음악: 최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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