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mixed media.
그림에 표현된 맹수의 표피 무늬는 수백 개의 눈의 결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자아가 형성되면서 타인과 자신이 분리됨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시선 속에 노출된다. 맹수는 그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세계를 상징한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단단하고 안정된 울타리가 되기도, 집단의 폭력성과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이는 위협적인 공포 덩어리가 되기도 하는 우리 인간 사회 말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에드가 루빈의 ‘루빈의 컵’이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은 한계가 있어서 한 이미지에서 두 가지 형태를 동시에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흰색 부분에 집중하면 컵이 전경으로 떠오르고 검은색 부분은 배경으로 사라진다. 반대로 검은색 부분에 집중하면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옆모습이 전경으로 떠오르고 흰색 부분은 배경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이 두 이미지를 동시에 읽어낼 수 없다.
그림 속 사람의 얼굴은 정면과 측면, 두 가지 방향으로 읽힐 수 있다. 먼저 얼굴의 옆모습에 초점을 맞추면 맹수의 거대한 입속으로 삼켜지는 얼굴이 목격된다. 반면 얼굴의 앞모습에 초점을 맞추면 뒤편에서 가만히 맹수를 관조하는 정적인 얼굴이 드러나 보인다. 전자에서 맹수는 막연한 공포로 한껏 과장되고 부풀려진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후자에서 맹수는 그저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는 관조의 대상이 된다. 두 장면은 동시에 읽힐 수 없다. 루빈의 컵처럼 한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다른 장면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두 장면은 어긋남을 전제로 한 그림 안에 공존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두려움은 우리를 ‘비본래적 존재’로 살아지게 하지만, 불안은 ‘본래적 존재’로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 우리는 이 둘을 넘나들며 자기 존재를 유지해 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흐르는 대로 살아지기도, 삶의 실상을 마주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기도 하면서 말이다. 한 그림 안에 있어도 만나지 못하는 두 장면처럼, ‘두려움’과 ‘불안’은 함께 만날 수 없고 어긋남을 전제로 우리 삶에 공존하며, 우리의 선택에 의해 매 순간 반복되며 경험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