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2017.
무언가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보이는 이미지의 일부가 전체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다소 엉뚱한 이미지로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있다. 보는 이의 환상이 작용한 것인데, 예를 들면 벽지의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천사의 이미지를 발견한다거나, 나무 바닥의 무의미한 얼룩 속에서 동물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벽지 속 천사나 얼룩 속 동물의 이미지는 단순한 상상이 만들어낸 공허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 이미지에는 무의식에 억압된 욕망이 현실 속으로 던지는 실재적 메시지가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에서 상징계를 흔들 수 있는 예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벽에 있는 얼룩, 벽난로 속의 석탄, 구름, 흐르는 개울물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그 양상의 일부를 기억해낸다면, 그것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그것들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당신은 매우 감탄할 만한 어떤 창안들을 발견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회화론」 중에서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을 사진으로 박제한 후 텅 빈 이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되거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쫓아 사진 위로 색을 채워나갔다. 우연히 찍힌 그 이미지들은 현실에 가려진 내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아니, 그 무언가가 말해지기 위해 우연을 끌어당겼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다. 사진에서 나에게 포착된 이미지들, 이를테면 마주 보는 사람의 얼굴이나 균열, 방치된 것, 화살표 등과 같은 형상들은 내 마음을 미묘하게 흔들었다. 그 틈을 비집고 튀어 오르려는 무의식과 이를 저지하려는 의식 사이의 힘겨루기. 둘의 팽팽한 그 신경전은 이윽고 어떤 엉뚱한 이미지를 툭 뱉어내고서야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 이미지는 어린아이의 문법으로 말해지고 있었다. 초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문법. 어쩌면 초자아의 검열을 피하고자 유아기 때의 이미지 문법을 빌어온 건 아닐지 잠시 생각했다. 무의식은 그 시절의 나를 소환해 말해지고 있었고, 장난기 어린 그림체에 녹아들어 관람자를 능청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덧씌운 시멘트가 벗겨지며 옛 아스팔트 바닥이 철길 옆으로 엉성하게 드러나 있었다. 문득 아스팔트와 철길 사이에 내재한 오래된 갈등 따위가 느껴졌고, 가까이 가려 할수록 어딘가 어긋나 버리고 마는 복잡 미묘한 애증 관계가 마주보는 두 얼굴 형상을 통해 드러나 보였다.
오래된 건물 외벽의 낡은 배관 파이프. 빨간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외관과 그 주위로 뻗은 벽의 균열에 마음이 갔다. 낡고 오래된 것, 방치된 것, 소외된 것. 그럼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것. 항상 거기 있으나 너무 당연해서 보이지 않는 것. 그것들이 품은 시간의 흔적은 묘한 아우라를 품고 있다. 그 흔적은 시간에 종속된 우리 삶의 헛헛함을 상기시키며 종종 나를 초연하게 했다. 우리는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 다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금의 여유도 일상에 접어들면 다시 사라질 테고,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죽음에 대해 머리로만 되뇌어볼 뿐이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으면 ‘자기 죽음’에 관해 쉬이 대면할 수 없는 유약한 존재이다. 캐릭터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 유약한 우리를 넌지시 응시한다.
신호를 기다리며 잠시 멍해지는 시간을 좋아한다. 멍하게 초점 없는 눈으로, 혹은 한 곳에 집중하다 느슨해진 시선으로 길 건너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한다. 시야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불분명한 형체들의 움직임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뭉뚱그린다. 주위가 몽롱하게 흐려지며 환상 속에 내가 들어온 건지 일상이라는 환상에서 내가 깨어난 건지 내 존재가 의심되는 지경에 다다르면, 내 안의 수줍은 천진함과 엉뚱한 상상력은 그 혼란과 모호함을 동력으로 현실 속에 튀어 오른다.
보이는 것 이면에 감춰진 모습들이 엑스레이에 포착되듯 그림에 담겼다.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떠오르는 이미지와 감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에만 오롯이 집중했다. 작업이 마무리된 후 그 과정을 천천히 짚어보며 창작자인 동시에 관람자가 되어 이미지를 이해하고 해석했다. 내 무의식이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그 노력은 내가 애써 외면하는 무언가의 실체를 부단히 드러내려 했으며, 그 앞으로 나를 끈질기게 몰아갔다.